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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정조대왕

洗心 2010. 2. 12. 09:51

조선의 정조대왕

1752년(영조 28년)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빈 홍 씨 사이의 둘째 아들이다.  

형인 의소세손은 3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1762년(영조 38년)에 청원 부원군 김시묵의 딸 청풍 김 씨와 혼인하였다.
1763년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자 왕세손으로 동궁에 정립되고

1763년(영조 40년)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이며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의 후사를 이어 종통(宗統)을 이어받도록 하였다.
1776년 영조가 승하하자 25세의 나이로 조선 22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매우 그리워하여 아버지의 묘소인 수은묘를

처음에는 영우 원으로 격상시켰다가 다시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이름 짓고 정기적으로 참배하였다.  

또한 현륭원 주변인 수원에 과학적 성채인 화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는 행궁을 만들었다.
1880년 49세의 나이에 병이 악화되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정약용과 수원화성

수원화성 건립에 정약용이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
화성(華城)은 1774년(정조 8년)에 시작해서 1796년(정조 20년)에 낙성된다.  

1963년 사적 3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최근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801년 (순조 1년) 9월에 발간된 화성성역 의궤(華城城役儀軌)가 남아 있어서 더욱 가치가 있는 성이며

화성성역 의궤는 조선 후기 화성 성곽 축조에 관한 경위와 제도, 의식 등을 수록한 책이다.

정약용은 1776년(정조 즉위) 남인 싶아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해

1783년 회시에 합격하여 경의 진사가 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792년 수원화성 축조와 관련 깊은 수찬(修撰)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 가설(起重架設)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당시 정조는 정약용이 나라를 이끌 인재로 낙점하여 등용하였고,

개혁적인 정조의 성향과 실학자인 정약용의 능력이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홍문관의 수찬은 왕에게 직접 간언 할 수 있는 자리이고 왕의 정책에 자문할 수 있는 관리로서

지금의 대통령 수석비서관과 흡사하다.  

따라서 정약용의 학문과 능력을 잘 알고 있던 정조가 수원성에 대해 정약용과 논하다가

결국 수원화성 축조에 그를 중히 쓰게 되었을 것이다.

 

 

 

 

 수원화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