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와 불일암에서 법정스님을 만나다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慧璘)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때 석조 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지눌의 정혜결사가 이 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
새로운 규모로 중창되고 한국 불교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지눌은 9년 동안 중창 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례 결사 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그 후 길상사를 수선사로 하였고 산 이름도 송광에서 조계로 하였다.
절 이름도 수선사에서 다시 송광사로 불리게 되면서 조계산 송광사로 되었다.
송광사가 번창하게 된 것은 지눌 스님에 의한 것이어서 송광사가 내려다 보이는 뒤쪽 언덕에 지눌 스님이 모셔져 있다.
그 이후 혜심 스님 때 크게 증축하였으나 정유재란으로 잿더미가 되었고 헌종 때는 큰 불이 나서 대웅전을 비롯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이듬해부터 절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여러 번 시작되었으나
1948년 여순반란과 6.25 때 다시 불이 났다. 1955년에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고
1983년부터 8년여에 걸쳐 30여 동의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도량의 모습을 일신하고 승보 종찰로서의 위용을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눌 스님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오르는 계단
지눌스님이 모셔져 있는 곳에서 내려다본 풍경
송광사는 연꽃 모습이라고 한다.
그래서 절 마당에는 탑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연꽃 위에 무거운 돌탑을 세우면 물에 가라앉는다고 세우지 않는단다.
담장 따라 오죽이 참 멋스럽게 자라고 있다.
신발 벗고 들어가는 해우소...
송광사에서 법정스님이 머무셨던 불일암 가는 오솔길로 접어든다.
송광사의 돌담이 큰 단풍나무와 어울려 정말 멋스럽다.
오솔길로 접어들다 내다본 송광사......
정말 한 송이 연꽃을 연상시킨다.
불일암으로 가는 길은 법정스님이 조성해 놓은 대나무 숲길이다.
초록색 대숲이 단풍과 어울려 정말 예뻤다.
사진기로는 저 단풍색을 표현해 낼 수가 없네...
분홍빛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주홍색도 아니고... 오묘한 색깔....
법정 스님은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입적하셨다.
폐암 진단을 받은 지 3년 만이었다.
무소유의 수행자인 스님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셨다.
전남대 상과를 다니던 중 출가해 효봉 스님을 은사로 산문에 들어섰다.
이후 쌍계사,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에서 수행생활을 하셨다.
법정스님은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무소유 은둔자의 삶만을 살진 않았다.
함석헌 선생과 문익환 목사와 더불어 민주화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그러던 그가 조계산 불일암으로 돌아가 수행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한 것은 1975년 10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젊은이 8명이 사형선고를 받은데 충격을 받고
독재자에 대한 증오심을 이겨내기 위하여 암자로 들어갔다.
그 후 불일암에서 <무소유>라는 산문집을 내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무소유는 스님 그 자체였고 삶의 전부가 되었다.
이후 1992년까지 17년간 불일암에 머물며 수행을 하였다. 그러나 이 곳을 찾는 이들이 너무 많아
수행하기가 힘들어 지자 불일암을 홀연히 떠나 강원도 산골 해발 800m 오지의 오두막에
홀로 은둔하며 향기로운 글을 많이 쓰셨다.
서울 성북동 요정 주인 김영한 씨가 당시 시가 1,000억 원 대에 이르던 7,000여 평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한 것도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삶에 감명을 받은 데서 연유하였다.
스님은 2008년 말에 입적을 예감하셨는지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산문집을 냈다.
입적하기 전날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데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 고 했다.
또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한 책은 더 이상 출간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평소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 비해 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 고 당부했다
스님이 직접 조성하였다는 대나무 숲이 해우소 뒤쪽으로 우거져 있다.
파초와 텃밭 그리고 작은 연못
후박나무
올려다본 나뭇잎이 정말 예쁘다
법정스님이 좋아하셨다던 후박나무..... 그러나 사실 이 나무는 '일본목련' 이란다.
일본 사람들이 일본목련을 '후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아마 조경하는 분들이 '후박'이라고 알려 주지 않았을까
짐작되는데 돌아가실 때까지도 후박나무로 알고 계셨는지 후박나무 아래에 유골을 묻어 달라고 하셨단다.
스님이 쓰신 책에도 '무성하던 잎을 미련 없이 훌훌 벗어 버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 이야기가 나오는데 일본목련은 가을이면 큰 잎을 다 떨어 뜨리지만
후박나무는 위의 사진처럼 상록으로 푸르게 잎이 달려 있다.
그래서 후박... 아니 '일본목련' 나무 밑에는 법정스님 유골이 묻혀 있다.
불일암은 조계산 송광사에서 산길을 따라 가면 있다.
암자가 처음 들어선 것은 고려시대였다고 하나 오늘날의 암자 모습을 갖춘 것은
순전히 법정 스님의 땀의 결과이다.
평소 무소유를 실천하신 법정 스님이 머물던 암자에는 최소한의 것들밖에 없다.
법당 하나. 우물 둘, 직접 만든 몸 씻는 움막 하나, 선방인 하사당, 장작더미, 지게 하나,
손수 만든 나무의자 하나, 해우소 하나.... 그리고 바람 한 자락.......
삶은 소유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그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