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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海美邑城) 본문
해뫼" 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의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해안지방에 출몰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태종17년 부터 건축을 시작하여 세종3년에 완성된 성이다. 해미읍성은 역사적으로 조선초기에 병마 절도사의 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징영에 1400~15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을 통치를 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국토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 기록을 남긴 바 없는 해미 진영은 1790년대 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 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만을 남기고 있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등 조정의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 속적으로 내포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처형하였다. 병인박해 때에만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 영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자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해미 진영에서 80여 년 간 에 걸쳐 지속적으로 쳐형된 천주교 신자의 숫자는 수천명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수 없다. 이렇게 내포에서 끌려와 감옥에 갇혀 있던 그 많은 신자들을 군졸들은 매일같이 해미 진영 서문 밖에 끌 어내어 교수형, 참수형, 물매질형,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등으로 처형하였고 서문 밖 처형지로 건너가 는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이라는 상상도 못할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해미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 죄인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나 머리채를 묶고 매달아 고문하던 호야나무가 지금 그 흔적을 간직한 채 서있다. 또한 서문 밖 바로 앞 에는 자리개질로 처형하던 돌다리가 보존 되어 있다.
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었다. 해미진영의 서녘들판에 십 수명씨 데리고 나가서 아무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들어 한마디 명령으로 산 사람 들을 밀어 넣어 흙과 자갈로 끌어 묻어 버렸다 한다.
해미읍성은 이렇듯 끔찍한 천주교 박해의 현장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성지순례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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