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로 바라본 풀꽃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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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꽃 -- 박상진교수님의 글

洗心 2006. 5. 21. 16:48

 주변을 환하게 밝혀줄 아름답고 화려한 꽃의 대표 자리는 모란이 차지한다. 그래서 모란은 예부터 화왕(花王)이라 하여 꽃 중의 꽃으로 꼽았다. 옛 사람들은 달덩이 같은 큰 얼굴에 이목구비가 반듯한 여인을 ‘모란꽃 같다’고 하여 바로 미인의 대명사였다. 오늘이야 옛사람들이 복 없다고 싫어하던 ‘팥잎만 한 얼굴’이 미인이고, 얼굴이 조금만 크면‘얼큰’이라고 하여 싫어할 만큼 세상도 많이 변했다.

 설총은 미인을 모란에 비유한 화왕계(花王戒)라는 설화를 지어 후세의 임금이 덕목으로 삼도록 하였다. ‘꽃 나라를 다스리는 화왕은 찾아오는 많은 꽃 중에서 아첨하는 장미를 사랑하였다가 뒤에 할미꽃 백두옹(白頭翁)의 충직한 모습과 충언에 감동하여 정직한 도리를 숭상하게 된다’는 내용이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 있을 정도다. 차음 모란은 미인을 상징하고 부귀영화를 염원하는 꽃으로 발전하였다. 민화풍으로 그려진 모란도(牧丹圖)는 혼례용 병풍으로 쓰였으며 고려청자 상감의 꽃무늬, 분청사기의 꽃, 나전칠기의 모란당초(牡丹唐草), 수놓은 꽃방석, 와당(瓦當)의 무늬, 화문석의 밑그림까지 모란의 상징성을 그림으로 나타낸 쓰임새는 끝이 없다.

모란은 중국에서 들어온 꽃이다. 대부분의 나무나 꽃이 언제 수입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모란은 우리의 역사책에 수입시기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기이(奇異)에는 선덕여왕(632-647)의 모란관련 일화가 적혀있다. 당나라 태종이 붉은 빛과 자줏빛, 흰 빛으로 그린 모란도와 씨 3되를 함께 보냈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고 꽃에는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정말 꽃이 피어도 향기가 없는지라 어떻게 먼저 알았는지 왕에게 물어 보았다. 왕은 말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음을 알 수 있었소. 이는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오.’라고 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여왕의 지혜로움에 감복했다는 것이다.

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관목으로 보통 높이 1m 남짓 자란다. 작은 잎은 달걀모양인데 3∼5개로 갈라지며 표면은 털이 없고 뒷면은 잔털이 있으며 대개는 흰빛이 돈다. 꽃은 붉은 자줏빛의 꽃잎이 5∼8편으로 이루어지며 지름 15cm 이상이다. 가지 끝에서 피는 한 개의 꽃은 보통 5∼6일 정도 핀다. 열매는 삭과이다. 꽃의 색깔은 예부터 여러 가지가 있었으며, 한림별곡(翰林別曲)의 내용 중에는 ‘홍모란, 백모란, 정홍모란(丁紅牡丹)‘이 등장한다. 인조23년(1646) 일본은 ‘청, 황, 흑, 백, 적모란’을 색깔별로 보내달라고 하였으나 다른 색깔은 없다고 적모란만 보내주었다. 동의보감에 보면 모란뿌리는 여자의 월경이 없는 것과 피가 몰린 것, 요통을 낫게 하며 몸푼 뒤의 모든 혈병(血病), 기병(氣病), 옹창을 낫게 한다하여 여러 부인병에 쓰였다.

화려한 모란꽃을 많이 심은 곳은 엉뚱하게도 절집의 안마당이다.‘목어(木魚)를 두드리다/졸음에 겨워/고오운 상좌 아이도/잠이 들었다/부처님은 말이 없이/웃으시는데/서역 만리 길/눈부신 노을 아래/모란이 진다’조지훈의 고사(古寺)Ⅰ에서처럼 모란은 봄이 무르익어 가는 산사(山寺)의 대표적인 꽃이다.

그 외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란 유명한 시로도 우리는 모란을 잊지 못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나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예순날 마냥 섭섭해 우옵네다/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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