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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머무는 곳

경희궁 (慶熙宮)

洗心 2012. 2. 7. 17:16

 지난주 1박 2일에서는 유홍준 교수와 함께 궁궐 답사로 경복궁을 보여 주었다.

경복궁을 거닐며 우리가 예사로 지나칠 법한 것들을 알아맞히는 출연진들에게 엽전을 주는 게임을 했다.

저도 여러 번 갔지만 예사로 보았던, 영제교 양옆 호안석축에 혀를 쏙 내밀고 있는 천록과 강녕전 위에는

왜 용마루가 없는지 그리고 강녕전 굴뚝 찾기 등을 문제로 냈다. 

마지막으로 5대 궁을 말해 보라고 유홍준 교수가 물었는데

모두들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까지는 알아맞히고 마지막 경희궁을 몰랐다.

힌트를 주어서 간신히 맞히긴 했지만....

경희궁은 1박 2일 출연자들 뿐만 아니라 어디에 있는지 모르시는 분들이 많다.

대부분 '경희궁' 하면 아파트 '경희궁의 아침'만 떠오른다.

그동안 미술전시 보느라 경희궁 미술전시관만 가 보고 경희궁 안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었다.

그러다 지난달 1월에 길벗 모임에서 덕수궁 돌담길 따라 정동길로 해서 경희궁을 가게 되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찾아오는 관람객들이 없어 우리가 전세 낸 듯 호젓하게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사진은 1월 모임 때 찍어 두었던 사진이다.

 

경희궁 (慶熙宮)은 본래 경덕궁(慶德宮)으로 불렸다고 한다.

처음 창건 때는 유사시에 왕이 본궁을 떠나 피우(避寓)하는 이궁(離宮)으로 지어졌으나,

궁의 규모가 크고 여러 임금이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창덕궁을 동궐이라 하고 

경희궁은 서궐이라고 부르며 중요시 되었다.

경희궁은 1617년(광해군 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 (광해군 15)에 완성하였다.

당시 광해군은 창덕궁을 흉궁이라고 꺼려 길지에 새 궁을 세우고자 하여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하였는데 다시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의 옛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는 그 자리에 궁을 세우고 경덕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 궁에 들지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결국 왕위는 정원군의 장남에게 이어졌으니 그가 곧 인조이다.

인조가 즉위하였을 때 창덕궁과 창경궁은 인조반정과 이괄(李适)의 난으로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에,

인조는 즉위 후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복구된 뒤에도 경덕궁에는 여러 왕들이 머물렀고,

이따금 왕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다.

즉, 제19대 숙종은 이 궁의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났고 승하한 것도 역시

이 궁의 융복전(隆福殿)에서였다고 한다.

제20대 경종 또한 경덕궁에서 태어났고, 제21대 영조는 여기서 승하하였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 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경희궁에 머물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을 정도로 였다.

제22대 정조는 이 궁의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고, 제23대 순조가 회상전에서 승하하였으며,

제24대 헌종도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1760년(영조 36) 경덕궁이던 궁명을 경희궁으로 고쳤는데, 그것은 원종의 시호가 경덕(敬德)이므로

음이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경희궁은 원래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는데 이렇게 궁궐의 하나로 중요시되던 경희궁이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건물이 대부분 철거되고,

이곳을 일본인들의 학교로 사용하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다.

이미 1907년 궁의 서편에 일본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고, 1910년 궁이 국유로 편입되어

1915년 경성중학교가 궁터에 설립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궁내의 건물은 철거되어 없어지거나 다른 곳에 이전되기도 하였고,

궁역(宮域)도 주변에 각종 관사 등이 들어서면서 줄어들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이곳은 서울중고등학교로 사용되면서 주변 대지 일부가 매각되어

궁터가 더욱 줄어들었고 1974년 학교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전체 부지는 민간기업에 매각하였다가,

1984년 이곳에 시민을 위한 공원을 조성하기로 하여

이듬해 궁터의 일부를 발굴조사하였으며, 1986년부터 공원으로 개방하고 있다.

 

경희궁은 건물의 배치가 외전과 내전이 좌우에 나란히 놓이고 전체적으로 동향을 하고 있어

정궁(正宮)인 경복궁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다.

즉, 경복궁은 남향으로 외전과 내전이 앞뒤에 구성되었는데 그것과 다르며 또한 궁의 정문이

바른쪽 모퉁이에 있는 점도 특이하다.

이런 점은 처음 이궁으로 지어졌던 창덕궁에서도 보이는 현상으로, 의도적으로 경복궁보다는

격식을 덜 차린 결과로 보인다.

각 건물의 구성을 살펴보면, 우선 외전에 있어서 정전(正殿)인 숭정전(崇政殿)은 궁의 서쪽에 동향하였고,

주위는 행각으로 둘러싸고 사방에 문을 두었다.

 

 

 들어가는 입구 홍화문을 지나면 숭정문이 멀리 보인다.

 왼쪽에 경희궁미술전시관이 있다.

 

 

숭정문(崇政門)

 

 

 

 

 

 

숭정전(崇政殿)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연회, 사진접대 등 공식행사가 행해졌던 곳이다.

특히 정종, 정조, 헌종,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숭정전 뒤에는 후전인 자정전(資政殿)이 있고, 주변에 수어소(守御所)인 태령전(泰寧殿)이 있다.

숭정전의 오른편, 즉 북쪽으로는 왕이 신료(臣僚)들을 접견하고 강연(講筵)을 여는 곳인 흥정당이 있고,

주변에 왕이 독서하는 곳으로 존현각(尊賢閣)·석음각(惜陰閣)이 있다.

 

 

 

 

 

 

 

태령전(泰寧殿)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 서암(瑞巖)

경희궁에서 제일 흥미로웠던 곳

바위 속의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광해군이 이 바위에 왕기(王氣) 서렸다고 하여 이곳에 경희궁을 지었다.

본래는 왕암(王巖)으로 불리었다가 1708년 숙종때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서암(瑞巖) 이란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었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 두었던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는다.

 

 

 

 

서암 오른쪽 바위도 범상치 않다.

궁궐 속에 이렇게 큰 바위가 있다는게 신기하다.

 

 

서암으로 올라가 본다.

 

 

 

 

바위 속은 따뜻하고 물기를 머금고 있어 풀들이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문에 달린 장식 모양이 유두 닮았다고 해서 웃었다. ㅋㅋ

모양을 이렇게 만든 이유가 또 있겠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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