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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洗心 2009. 1. 20. 17:51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한국적 슬픔 깃든 선율로 세계 정상에 오른 입양아 2세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순박한 미소가 어쩐지 사람의 마음을 끄는 젊은 남자가 무대 위에 서있다. 짧은 커트 머리의 작은 얼굴, 훤칠한 키의 동양인 남자다.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면서 비올라를 켜는데, 섬세하면서도 힘 있고 신중하면서도 자신감이 느껴지는 동작이 인상적이다. 아름다움에 슬픔이 번져 나오는 그의 음악은 사람들로 하여금 저마다 가슴 한편에 묻어 두었던 옛 감정들과 조우하게 한다.
추명희  TOP CLASS 기자
  “제 음악을 들으면 눈물이 난다고 해요. 멜랑콜리한 비올라의 음색이 마음에 가 닿는 거지요. 하지만 저는 사람들이 제 음악을 듣고 행복했으면 해요.”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28세). 줄리어드 음악원을 졸업하고 현재 링컨센터 체임버뮤직 소사이어티와 현악앙상블 팀인 세종 솔로이스츠의 수석 비올리스트 겸 솔로이스트로 활동 중인 그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미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뿌리 깊이 ‘한국적 한’을 품고 있어 한국 팬들을 사로잡고 있다. “완벽한 테크닉과 자유로운 상상력이 돋보인다”는 평을 듣는 그는 올해 미국 클래식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히는 에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상을 받았고, 그래미상 베스트 솔리스트 부문에도 노미네이트됐다.
 
  새 앨범 ‘눈물’을 들고 한국을 찾은 그는 지난 9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전국 순회 연주를 하고, 통영 국제음악제 오프닝 공연 때 솔리스트로 무대에 오르는 등 어느 때보다 빽빽한 일정을 소화했다. 오는 12월 3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세종 솔로이스츠 공연에 참가하기 위해 다시 한국을 찾는다.
 
어머니와.

  그의 어머니 콜린 오닐(한국명 이복순)은 전쟁고아였다. 네 살 때인 1957년 미국으로 입양됐고, 어릴 적 앓은 열병 때문에 정신지체가 됐다. 어머니는 미혼모로 그를 낳았다. 어머니가 그를 키울 처지가 못 돼 리처드 용재 오닐을 돌본 사람은 어머니를 입양한 미국인 외조부모였다. 외조부모는 그를 누구보다 정성껏 키웠다. 음악가의 길로 접어든 것도 다섯 살 때 그에게 바이올린을 선물한 외할머니 덕이었다.
 
  “차로 왕복 네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로 레슨을 받으러 갔는데,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그 먼 길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당신께서 손수 운전해서 데려다 주셨죠. 10년 동안 한결같이. 외할머니는 저에게 항상‘네가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하늘이 도와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외할아버지는 병원에서 일하다 은퇴해 TV 수리점을 꾸려 가셨는데,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54년의 결혼생활 동안 36명의 입양아를 돌보았다고 한다. 용재는 ‘할머니의 예언’대로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아 열다섯 살 때 노스캐롤라이나 예술학교로 진학했고 음악가의 길을 스스로 개척했다. 예술학교 시절 그는 비올라로 진로를 바꿨다. 바이올린이나 첼로에 비해 별로 주목받지 않던 악기였지만 그 낯선 느낌이 좋았다고 한다. 바이올린처럼 가늘지도 첼로처럼 굵지도 않은 음색. 안정적인 듯하면서도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소리가 좋았다.
 
  “처음 손에 들 때부터 편안했어요. 엄마 목소리 같기도 하구요.”
 

  용재는 현재 이탈리아의 조반니 토노니가 만든 1699년산 비올라로 연주한다. 지난 5월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상금으로 장만했다. 그는 장영주, 김지연, 다리엘 리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네 번째‘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수상자이다. 이제까지는 삼성문화재단이 대여해 준 비올라를 사용했었다. 이 상금이 아니었다면 수억 원에 이르는 비올라를 장만하기 어려웠을 거라며 “실력을 인정받은 것도 기쁘지만 상금을 받아서 더 좋았다”고 귀띔한다. 이번에 발표한 앨범 ‘눈물’은 그를 이만큼 만들어 주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에게 바치는 선물이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했던 두 분은 몇 년 전 모두 돌아가셨다.
 
  “마지막 곡인‘섬집 아기’는 이번 앨범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입니다. 제 음악을 들으면서 각자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어머니를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 소르의 ‘라 로마네스카’, 보테시니의 ‘엘레지’ 등 크로스오버 스타일의 애조를 띤 음악을 담은 이 앨범은 지난 9월 발매되자마자 한 달여 만에 2만 장 가까이 팔리며 단숨에 클래식 앨범 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특히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재즈 모음곡 2번’은 그가 직접 편곡한 것이다.
 
  미국인 외조부모 밑에서 성장한 그가 어떻게 한국인의 가슴에 스며드는 ‘한국적인 정서’가 듬뿍 담긴 음악을 연주할까? 그는 이를 강효 교수 덕이라고 한다. 남가주 대학을 졸업하고 줄리어드 음악원 석사 과정에 들어간 그는 거기서 한국인 강효 교수를 만났다. 입학 당시 그는 줄리어드 1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아 화제를 모았었다.
 
  “강효 교수님을 만나면서 한국인으로서 저의 정체성을 깨닫기 시작했어요. 선생님은 제가 어머니의 나라 한국을 이해하게 해주셨고, 친아버지처럼 많이 돌봐 주셨어요. 그전까지는 제가 미국인인 줄로만 알았거든요.”(웃음)
 
  그의 미들 네임 용재(勇才)도 강 교수의 부인 강경원 씨가 직접 지어줬다. 구김 없고 똘망똘망한 그를 보니 용기와 재능이란 이름이 절로 떠올랐다고 한다. 그는 이 이름의 의미를 듣는 순간 마음에 쏙 들었다고 한다. 2001년 강 교수가 이끄는 세종 솔로이스츠에 들어간 용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한국인 단원들에게 한국에 대한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만큼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나라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머니는 전쟁고아로 미국에 입양
 
  “한국의 어머니들은 매우 엄격하다고 들었어요. 아이들 교육에 간섭이 심하다고요. 우리 엄마는 저를 자유롭게 그냥 놔두셨어요. 무엇을 할 것인지, 연습을 할지 안 할지 모두 저 스스로 결정했죠. 어쩌면 그랬기에 음악을 계속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머니 나라가 그리웠던 용재는 이제 한국의 어머니들로부터 듬뿍 사랑을 받고 있다. 40여 일 동안 전국 순회공연을 했을 때 공연마다 티켓이 매진될 정도로 그의 인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클래식 음악계의 배용준’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연주회가 끝난 후 이어지는 사인회에는 언제나 중년 여성들이 길게 줄을 늘어선다. 연주를 마친 후 제대로 숨 돌릴 새도 없이 이마에 땀을 줄줄 흘리며 한 사람 한 사람 정성껏 사인을 해주던 그는 “행복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같다”며 웃는다.
 
  “저는 한국 아줌마들이 좋아요. 저를 당신의 아들처럼 대하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것도 기분 나쁘진 않아요. 그분들 각자의 삶을 존경하니까요. 한국의 아줌마들은 다른 나라의 아줌마들보다 특별한 에너지가 있는 것 같아요.”
 
  한국말이라면 “감사합니다”“죄송합니다” 정도밖에 모르는 용재는 신기하게도 ‘한(恨)’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유독 슬픈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한의 정서와 연관해서 이해했다. 그는 “40~50대 중년 여성들이 저의 음악을 좋아하는 건 그들의 마음속에 한이 많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예요. 젊은 사람들은 단순하고 경쾌해요. 힘들고 어려웠던 경험이 별로 없으니까요. 하지만 나이 든 분들의 삶에는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쌓여 있어요. 마음속에 맺힌 것들이 많지요. 전쟁고아로 가족과 헤어져 완전히 낯선 땅으로 왔던 우리 엄마와 같은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저는 젊은 세대이기는 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독립해 혼자 살면서 외로움이나 한 같은 정서를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용재도 나중에 결혼하면 아이를 입양할 생각이 있을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는 “아마도… 언젠가는…” 하고 내뱉다가 멈칫했다. 정확한 대답은 “지금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직은 결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고 한다. 미국과 한국, 유럽을 오가며 연주하는 지금 그의 생활에서 결혼은 너무 먼 얘기인지도 모른다. 아직 여자친구도 없다. 다만 외할머니나 엄마처럼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다는, 막연한 이상형이 있을 뿐이다. 용재에게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오 마이 갓. 난 매우 복잡해요. 어떤 면으로는 굉장히 열려 있고 또 어떤 면으로는 굉장히 고요하고… 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자기가 누군지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용재가 자신에 대해서 아는 확실한 것은 자신이 지금 행복하다는 사실뿐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그는 앞으로도 늘 지금처럼 행복했으면 하고 바란다. 그리고 미국 서부 오리건주에 사는 어머니 복순 씨와 그녀의 남자친구 빌도 지금처럼 행복하게 잘살았으면 하고 바란다.
 
  “전 축복받은 사람이에요. 엄마를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하죠. 엄마도 나를 사랑하고요. 하지만 저만 행운아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세상 모든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모두 행운아입니다.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권력이 있거나 없거나 심지어 건강하거나 건강하지 않거나 어떻든 간에 자신의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다면 누구든 행복해질 수 있어요. 더 강해질 수 있어요.”
 
  용재는 음악가 중 바흐, 모차르트, 브람스를 특히 좋아한다고 말한다. 바흐 음악 속에 내재된 열정, 모차르트의 아름답고 심플한 선율 속에 흐르는 슬픔과 비극, 그리고 브람스의 애수를 사랑한다. 수백 년을 이어온 바흐, 모차르트, 브람스의 음악이 이제 그의 비올라를 통해 21세기 음악으로 살아나고 있다.
 
  그는 잡채와 불고기, 빈대떡 그리고 덕수궁 돌담길과 명동을 좋아한다. 그런가 하면 뉴욕의 아파트에 살며 크리스피 크림 도넛과 버거킹 햄버거를 즐기는 미국인이기도 하다. 한국계 미국인인 그는 사실 한국인이니 미국인이니 하는 구분을 넘어선 세계인이 아닐까? 그것도 세계적 거장 자리를 예약한 ‘용기 있고 재능 있는’ 음악가 말이다. 유리 바쉬메트, 킴 카쉬카쉬안, 노부코 이마이 같은 세계적인 비올리스트들의 탄생으로 비올라는 이제 미래의 악기로 조명받고 있다. 리처드 용재 오닐, 이제 그의 차례다.
 
  사진 : 이규열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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