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로 바라본 풀꽃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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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 폴링 ( Où va la nuit )

洗心 2012. 11. 6. 16:33

 만추....

요즘 길을 걷다 보면 은행나무의 잎사귀들은 작은 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져 내립니다.

비까지 내려 더 짙어진 노란 잎을 밟으며 걷다 보면 마음까지 멜랑꼴리....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하네요.ㅋ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제....  보고 싶어 찜해 두었던 영화 <롱 폴링>을 보았습니다.

The Long Falling.....

직역하자면 오랫동안 떨어지는.... 다른 말로 <긴~ 하강> 아님 <긴~ 추락>이라 해야 할까요?

이 영화는 떨어지는 낙엽, 가을이야기가 아닙니다.

30여 년 긴 세월 매 맞고 살았던 로즈란 여인의 기구한 이야기입니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피해자에서 오히려 가해자가 된 불행한 여인의 이야기이지요.

 

롱 폴링 ( Où va la nuit )

마르탱 프로보스트 감독, 욜랭드 모로 주연의 프랑스 영화입니다.

욜랭드 모로를 비롯하여 모든 출연진들의 연기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그냥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듯하더군요.

섬세하고 극적인 연기와 연출력이 돋보였던 영화 <롱 폴링>은 매 맞는 아내의 살인이라는 극적인 내용임에도

영화는 너무나 평온하게 흘러갑니다.

로즈가 남편을 살해한 후 쫓고 쫓기는 급박한 상황임에도 다른 영화들처럼 관객들을

긴장감으로 가슴 졸이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담하리 만치 로즈가 겪게 되는 나락의 여정을 차분하게 그려냅니다.

천천히 떨어지는 나뭇잎을 클로즈업하듯이.......

 

 

첫 장면....

캄캄하고 음산한 밤... 묘한 분위기의 숲

그 숲 속을 한 아가씨가 바쁜 걸음으로 빠져나오더니 도로 위에서 자신을 태워줄 자동차를 찾습니다.

그때 음주운전으로 비틀비틀 갈지자로 달려오던 자동차에 아가씨는 치여

길가에 나동그라지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음주운전을 한 사람은 주인공 로즈의 남편입니다.

 

 

로즈는 남편에게 30여 년을 매 맞고 살아온 여인입니다.

과실치사로 풀려난 남편은 또다시 폭력을 행사합니다.

자신이 죽인 아가씨에 대한 일말의 양심도 못 느끼는 남편에게 그동안 참았던 분노가 한꺼번에 터진 듯

로즈는 술을 마시러 간 남편이 돌아오는 길목.... 남편이 아가씨를 죽였던 바로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술 취한 남편이 비틀거리며 걸어오자 분노에 찬 얼굴로 자동차를 쏜살같이 몰아 남편을 받아 버립니다.

그리곤 자신의 집 농장으로 돌아와 차를 깨끗하게 씻어 냅니다.

지난번 남편의 사고 때 안면이 있던 담당 형사 놀즈가 집으로 찾아옵니다.

단순한 사고사가 아닌 것을 직감한 형사였지만 로즈를 동정이라도 하듯 사건을 몰아붙이지는 않습니다.

남편의 장례식을 담담하게 치른 후 로즈는 짐을 싸서 16세에 집을 나가 도시에 사는 아들 토마스를 찾아갑니다.

 

 

로즈의 아들 토마스 또한 폭력의 또 다른 희생물입니다.

어머니와 자신에게 행사하는 아버지의 폭력을 못 견디고 일찌감치 도시로 도망가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집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고 지낸 토마스는 게이입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토마스가 게이가 된 것은 단순한 설정만은 아닌 듯합니다.

동성애자나 양성애자가 태어날 때부터 유전적으로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지만

어린 시절 비뚤어진 부모와의 관계로 성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니

토마스가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나이 많은 빈센트와 동거한다는 것은

어쩌면 어릴 적 당했던 학대의 결과를 상징하는 것 같더군요.

 

 

로즈는 아들 토마스를 찾아와 잠시 자유를 만끽하지만 남편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있던 경찰과 기자에 의해

로즈가 남편의 살해자라는 것이 밝혀지고 결국 아들 토마스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지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말을 듣고 토마스는 오열합니다.

"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지금까지 참아 왔는데...... 어차피 조금 더 있으면  술 퍼 먹다가  알아서 죽을 것을...." 하고.....

너무나 증오한 아버지였지만 어머니 로즈가 살해했다는 말을 듣고는 어머니를 마구 몰아붙입니다.

"왜 그동안 참고 살았느냐 도망가지...." "지금까지 참아 온 세월이 허무하게 왜 죽였느냐"....

 

영화 내용 중에 토마스 때문에 참고 살았다는 대사가 나오긴 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아들은 16세에 집을 뛰쳐나갔기 때문에 그 뒤에 로즈도 떠나면 그만이었던 것이지요.

떠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로 "남편은 혼자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떠나지 못했다는 말을 하는데 

희생,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남편을 살해하고는

별로 양심의 가책이나 후회를 느끼는 것 같진 않았기에 이 또한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럼 왜 떠나지 않고 결국 자신까지 파멸시킬 살인을 하게 되었을까요?

영화 장면 중에 남편에게 두들겨 맞고는 어디론가 떠날 듯 가방을 주섬주섬 싸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호기롭게 방을 나서는 듯하다가 일층으로 한 바퀴 휙 돌더니 다시 위층 침실로 올라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이 바로 로즈의 심리를 대변하는 것 같더군요.

오래 맞고 살다 보니 무기력하고 자신감이 상실되어 과감하게 세상 밖으로 나갈 용기마저 상실된 것이지요.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고백을 듣고 자수하라는 토마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도주를 하던 로즈는

우연히 머물게 된 여관의 주인 탈보 부인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결국 경찰의 포위망에 둘러 싸이고 맙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고 안타깝게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냈던 탈보 부인이

남편의 학대를 받았던 로즈에게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긴 했지만

불쌍한 로즈 같은 사람에게도 놀즈 형사나 탈보 부인 같이 따뜻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한줄기 빛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닐까 싶더군요. 

 

 

 

마지막.....

놀즈 부인의 도움으로 부둣가에 도착하여 막 배로 오르려 하는 순간

경찰차들이 로즈와 놀즈 부인이 타고 있는 차를 에워쌉니다.

이제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느낀 로즈는 담담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립니다.

경찰차에 타고 온 아들을 바라보는 표정에서 오히려 홀가분해하는 듯 느껴집니다.

 

" 경찰엔 안 가요. 고통은 충분히 받았어요"라고 외치던 그녀....

그러나 막다른 길에서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순진하면서도 묘한 눈빛으로 아들을 응시하는 마지막 엔딩 장면은

오랫동안 짠한 여운으로 남았습니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피해자가 결국 가해자로 돌변한 불행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도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왕따를 당하던 피해 학생이 참다 참다 가해자로 돌변하는 일.....

로즈처럼 남편의 폭력에 참다 참다 결국 딸과 함께 남편을 살해한 사건이 우리나라에도 얼마 전에 있었지요.

로즈의 남편도 처음에는 폭력적이지 않았는데 첫아들이 어릴 때 물에 빠져 죽은 후

로즈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대사가 나오더군요.

자신의 괴로움이 로즈 때문이란 심리가 작용하면서 폭력을 행사하고 술과 함께 점점 강도를 더해 가지 않았을까.....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아무런 저항도 반항도 하지 않은 안타깝고 무기력한 불쌍한 로즈.....

세상의 관심과 사랑이 조금만 일찍 로즈에게 닿을 수 있었다면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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