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로 바라본 풀꽃세상

성북구립미술관을 다녀 왔어요. 본문

공연, 영화,음악, 전시회

성북구립미술관을 다녀 왔어요.

洗心 2011. 11. 11. 15:47

뜨끈한 우리밀 국시가 먹고 싶어서 성북동으로 갔다.

간송미술관 건너편에 있는 우리밀 안동국시( 국시라고 해야 맛있는 느낌)는

육수에 별다른  고명도 없는 담백한 칼국수인데

밀가루 반죽을 어떻게 하였는지 쫄깃하면서도 아주 부드러운 게 특징이다.

반찬도 부추김치와 얼갈이김치, 묵은 김치와 양념장이 전부이고

가격도 7000원이니 싼 편이 아니지만 한 번씩 생각이 난다.

아무튼 국수를  맛있게 먹고 근처에 있는 성북구립미술관에서

<그 시간을 걷다> 展을 보고 바로 옆에 있는 수연산방과

만해 한용운 선생이 머물렀던 심우장을 들렀다.

그리고 성북동의 고불고불 마을길을 지나 성벽을 따라 좀 걷기를 한 후

버스를 타고 감사원 앞에서 내려 북촌마을을 배회(?)하다 돌아왔다. ㅎ

길상사 쪽 성북동과 달리 심우장이 있는 성북동 마을 주택들은

1950년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성북동의 두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흥미진진한 골목길 투어였다.

 

 

 

 

아래 사진은 성북구립미술관에서 2000원 입장료 내면 한 장씩 나눠 주는 엽서이다.

김용준이 살았던 노 시산 방(老枾山房)의 사진인데 이 사진이 좋았다..

노시산방 감나무 밑에 자연스럽게 서 있기도 하고 앉아 있기도 한 가족사진이다.

근원 김용준이 성북동으로 이사를 한 것은 1934년,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였는데도

이사 온 까닭에 대해서는 그의 글 <노 시산 방기>(1939년 무렵의 글)에서 살펴볼 수 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문전에 구루마 한 채도 들어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 뒤에는 꿩이랑 늑대랑

가끔 내려오곤 하는 것이어서 아내는 그런 무주구천동 같은 데를

무얼 하자고 가느냐고 맹렬히 반대하는 것이었으나,

그럴 때마다 암말 말구 따라만 와 보우 하고 끌다시피 데리고 온 것인데, 기실은

진실로 내가 이 감나무 몇 그루를 사랑한 때문이었다.'

그가 이사 오고 나서 일이 년 뒤에 이태준이 그 감나무의 늙음을 기려

“노시사(老柹舍)”라 명명하였고,

근원은 이를 그대로 받아 자신의 성북동 집을 “노시산방(老柹山房)”이라

이름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 시간을 걷다> 展은

성북 지역에서 창작의 근원지로 삼아 활동했던 미술, 문학, 음악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문화예술가 16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전시로

초상화 사진 16점 외에 성북 지역의 관련 기록이 담긴 사진자료와 

당시 서로 교류하며 지냈던 문화예술인들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엽서,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1. 김광섭 2. 박태원, 3. 이태준 4. 전광용. 5. 조지훈 6. 한용운

7. 권진규 8. 김기창 9. 김용준 10. 김환기

11. 박래현 12. 변종하 13. 송영수 14. 전형필 15. 최순우 16. 윤이상

 

성북구립미술관에서 근현대 문화예술인들의 흔적을 잠시 보고 산책 겸

이태준이 살았던 수연산방( 壽硯山房)과

만해 한용운이 세상을 떠나기 전 10여 년을 보냈던 심우장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또 어벙한 나를 발견하였다. ㅠㅠ

수연산방에서 사진기를 꺼내 찍으려니 셔트 소리가 이상하다.

아뿔싸.!~ 메모리가 들어있지 않았다...ㅠㅠ 정신이 이렇게 없다... 울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아무튼 그리하여 카메라는 가방에 고이 간직하고 눈으로 찰칵찰칵 찍으며 다녔다. ㅎㅎ

 

상허 이태준이 살았던 수연산방(壽硯山房)은 이태준이 적어도  50에서부터 70까지 살면서

좋은 글을 쓰고 싶다고 하면서 부친의 요절을 겪은 데서 목숨 '壽' 자를,

부친의 유품으로 연적을 남긴 인연으로 '硯'을 썼다고 한다.

그리 오래 살기를 희망했지만 1946년 온 가족을 데리고 월북하였기에

사망 시기에 대한 기록이 다양하고 정확하게 언제까지 살았는지 알 길은 없다.

월북 이후 북한에서도 끊임없는 검증과 비판을 당하여 결국 숙청당하였고

더욱 기막힌 것은 상허가 남긴 2남 3녀들.....

그들은 모두 김일성대학을 나온 수재들이었지만

당성이 부족한 아버지를 두었다는 이유로 비극적 생을 살아야 했다.

 

이태준 부부와 2남 3녀

 

수연산방을 보고 조금 위로 올라가다 길 왼쪽 모퉁이에 적힌

'심우장' 이란 팻말을 보고 골목길로 구불구불 오르다 보면

만해 한용운 선생이 1933년에서 1944년까지 

만년을 보내시다가 세상을 떠난 곳인 바로 심우장이 있다.

심우(尋牛)란 본성을 찾아 수행하는 단계를

동자가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묘사한

불교 선종화 중 첫 번째 그림이라고 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한옥으로 지은 심우장이 북향 하여 서 있고

대문 맞은편에는 단층으로 지은 관리인의 주택이 있다.

대문 왼편에 소나무, 오른편에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고...

심우장이 북향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하게 되므로

북향으로 지었다고 하는 일화는 유명하다.

우리가 찾았을 때는 아무도 없고 관리인이 조용히 마당에 떨어진 은행잎을 쓸고 있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일제의 탄압과 회유에 변절하고 다른 길을 갈 때에도,

만해는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었고

또한 일제에 호적을 올리지 않아 배급도 받지 않은 채

이곳에서 영양실조에 걸려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절구공을 갈아 바늘이 될 정도로 정진하고자

스스로 다짐하며 적었다는 마저절위(磨杵絶韋)라고 적힌 친필액자 앞에서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돌아 나왔다.

 
Comments